Melencolia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동판화 『멜랑콜리아 I(Melencolia I)』에는 기하학적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컴퍼스, 자, 다면체, 모래시계. 지식과 이성의 상징들이지만 천사는 그것들을 내려다보며 깊은 우울에 잠겨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멜랑콜리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깨달은 자들이 겪는 숭고한 고통이었다.
사랑이 끝나는 순간, 우리는 뒤러의 천사가 된다. 손에 쥔 컴퍼스로 완벽한 원을 그리려 하지만, 두 점 사이의 거리는 변수이고, 중심은 계속 이동한다. 기하학이 약속한 질서는 감정의 혼돈 앞에서 무력하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로는 마음의 빗변을 구할 수 없고, 유클리드의 공리로는 관계의 평행선이 만나지 않는 이유를 증명할 수 없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우울을 토성의 영향으로 여겼다. 가장 멀리 있으면서도 가장 무거운 행성, 시간을 지배하고 성찰을 강요하는 별. 관계의 종료는 토성적 경험이다. 거리는 물리적 단위를 넘어서 형이상학적 개념이 된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닿을 수 없는 거리,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지는 마음의 거리, 기억 속에서만 가까워지는 역설적 거리.
뒤러의 천사가 응시하는 다면체는 불완전한 입체다. 정다면체가 아닌 기하학적 기형물. 사랑 역시 그러하다. 완전한 구체가 되리라 믿었지만, 실상은 모서리와 면이 어긋난 불규칙한 형태이다. 그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멜랑콜리의 시작이다.
르네상스의 휴머니스트들은 멜랑콜리를 천재성의 조건으로 여겼다. 피렌체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는 토성 아래 태어난 자들이 ‘창조적 열정’과 ‘신성한 광기’를 통해 가장 깊이 사유할 수 있다고 했다. 해체가 가져다주는 고독은 그러므로 저주가 아니라 축복일 수 있을까. 상실의 기하학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지혜가 탄생할 수 있을까.
멜랑콜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는 모래시계다. 시간의 흐름을 가시화하는 장치. 관계가 종료된 후, 우리는 시간의 이중성을 경험한다. 함께했던 시간은 영원처럼 느껴지고, 홀로 보내는 시간은 모래알처럼 빠르게 흘러간다. 기억 속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뒤러의 천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수용의 미학’인걸까. 완벽한 기하학적 질서를 포기하고 불완전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사랑의 실패를 인간 이성의 한계로 인정하는 것.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멜랑콜리가 시작된다. 단순한 슬픔을 넘어선, 존재의 조건을 성찰하는 숭고한 우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