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ces

추억 한 조각
S로부터 이메일이 시간을 두고 두 개나 왔다. 먼저 하나를 보냈었는데 내가 답신이 없어 하나를 더 보낸 모양이다. 안부 연락이다. 내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탓이다. 이메일 체크를 좀 자주 해야겠다. 미안하고 고맙고 반가웠다.
나와 S, 그리고 B와 H 이렇게 넷은 동갑내기로 꽤 많이 뭉치곤 했다. 각자 캐릭터는 정말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균형있게 곧 잘 어울렸다. 가령 누구라도 조용하게 다운되면 만날 자리를 만들어 불러내 에너지를 주고, 누군가가 들떠 말이 많아 버겁기라도 하면 친근한 다그침으로 응징하곤 했다.
각자의 가는 길이 달라져 자연스레 연락이 뜸해졌다. 어쩌면, 혼자 멀리 떨어져나온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수도 있다. 그 동안 녀석들에게 어떤 좋은 일이 있었는지 어떤 힘든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부끄럽고 미안하게도 말이다.
후문 거리, 노량진 돈까스, 와인바, 한강공원. 오랜만에 사진첩을 뒤져 추억 몇 조각들 들춰보니 재미가 있다. 만약 이 글을 본다면 앨범을 한번 거슬러 올라가볼래.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만나도 어색하지 않을 것만 같다. 나는 숨쉬며 잘 지내고 있어. 곧 보자.
그림 한 조각
멍하니 집에 있던 하루였다. 하얗디 흰 벽이 휑하게 느껴졌다. 모양과 색깔내는 손재주만큼은 딱히 없다고 믿는지라 나의 무언가를 걸 마음은 없다. 책꽂이에 보이는 도록을 펼쳤는데 한 페이지에 실린 그림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화가이셨다. 모 유명작가처럼 후대에 막대한 명예나 부를 물려주신 분이라고 할 순 없지만, 한국 근현대예술사에 획을 남기신 1세대 모더니스트다. 북쪽에서 내려와 예술에 대한 열정 하나로 평생을 보내신 분이다. 우리 가족은 이에 대해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비록, 나는 미처 뵙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 열정을 나는 가진 적이 있었던가. 짧은 반성이 스쳤다.
오랜만에 다짜고짜 아버지께 연락해 할아버지의 작품을 걸고 싶다고 말했다. 타지에 있는 아들이 당신의 아버지 작품에 대해 묻다니. 약간 흠칫 놀라시는 듯 했지만 이내 말씀이 많아지셨다. 신나보이셨다.
유화물감을 사용한 원화를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지만, 캔버스에 비슷한 느낌을 내기 위해 Pigment Print 라는 기법으로 인쇄해야 한다고 하셨다. 사이즈는 어느정도여야 작품의 느낌이 사는지, 인쇄소의 프린터 모델은 무엇인지, 나무 프레임은 어떻게 해야하고 측면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많은 가이드를 주셨다. 얼마 전 100주년 유작전이 있었던지라 고화질 디지털 스캔 파일이 있었다. 예술가의 도시인 베를린답게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퀄리티로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공허했던 흰 벽은 채워졌다. 원화는 아니지만, 할아버지의 숨이 담긴 그림 한 조각을 이제서야 곁에 두게 되었다.

할아버지. 내가 들떠 부유하고 무언가에 휩쓸릴때면, 송곳과 같은 차분함 그리고 따스한 냉정함을 주세요.
할아버지. 내가 한없이 작아져 어디라도 숨고 싶을때, 한 획의 자신감과 채도 높은 열정을 주세요.
당신의 조각들
날이 맑은 날 밤 하늘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수많은 별이 보이곤 한다.
K에게서 온 메일이었다. 오랜만에 어색하기만한 안부와 함께 어머님의 비보 또한 접했다.
그 옛날 나는 K와 함께 학교나 학원이 끝나고 꽤 많이 어머님의 차를 얻어탔었다. K의 집에서부터 15분은 더 운전하셔야 하는 거리를 거의 매번 태워주시곤 했다. 어머님의 차에는 내가 좋아했던 Lotus 과자를 비롯하여 항상 맛있는 것들이 많았다. 활발하고 가끔은 산만했던 K에게 나를 본받아보라며 녀석을 꾸짖으시기도 했다.
불의의 사고를 겪으신 후, 한국의 어려운 의료 상황으로 인해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하셨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목이 메었다. 이제 자리를 잡아 돈도 벌고 독립도 하고 결혼도 예정되어있는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몇 달이나 지나 덤덤한 척 전하는 소식이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몇년 전 문득 내 안부를 물어보셨단다. K도 나의 근황에 대해 알지 못해 답을 드리지 못했다고 했다. 기억해주셨구나 나를. 마음이 너무 아프고 눈물이 난다.
J의 아버님을 난 알지 못한다. 아니, 그래도 J로부터 전해 들은 바가 있으니 직접 뵌 적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더 적절할 것이다.
J는 아버님을 잘 알고, 많이 사랑한다. 미래의 나의 자식이 나를 그렇게 바라봐준다면 더할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 난들 내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겠냐마는, ‘아들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는 말을 농담삼아 하시는 부모님에 대해 데면데면하며 표현이 서투른 아들인 나로서는 신기하고 부러운 충격이었다.
J의 사례는 내가 나의 부모님을 바라보는 관점에 영향을 주었다. 무엇이 닮았고, 어떤 것은 다른지. 무얼 좀 더 본받고 싶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여태껏 나는 내 부모님에 대해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받아들였었지, 직접 곱씹어 생각해 본 적이 부끄럽게도 없었다. 어쩌면 나의 부모님은 원하고 계실 수도 있다.
내가 아는 J는 자신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다. 이를 바탕으로 제3자인 나의 눈으로 볼 때, J의 아버님은 J 스스로 본인은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강력한 레퍼런스였으리라. 단순히 가족이라는 사실을 초월하여 끈끈한 연결을 느끼는, 절반을 물려준 존재와 멀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는 아픔보다 더 컸을 것이다. 감히 나는 그가 거쳐온 생각의 깊이와 무게를 가늠할 수 조차 없다.
만약 내가 한국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면, 이메일을 제때에 확인했더라면 어쩌면 J와 함께 아버님을 뵙고 인사를 드릴 수도 있었을까. 허락 없이 주제넘은 생각을 마음속으로 해 본다. 49재에 멀리서 순수한 마음을 보탠다.
겨울 바람을 쐬러 나간 발코니 난간에 팔을 걸치고 밤 하늘을 본다. 오늘따라 밝게 빛나는 별 두 개가 늘었다.
근심도 아픔도 없는 그 곳에서 부디 편히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