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 세상에서 길게 호흡하기

숏폼 세상에서 길게 호흡하기

베를린에서 대중교통에 올라 할 수 있는 재밌는 일들 중 하나는 사람구경이다. 대낮부터 인사불성인 취객, 우는 아기를 달래는 부모, 수다떠는 잼민이들 등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있다. 그 중에 책이나 신문을 읽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이 독일에 처음 왔을 때 기억에 남는 좋은 첫인상이었다. 물론 지하철같은 경우 모바일 네트워크가 잘 터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치명적인 이유가 있지만 말이다.

반면, 한국의 지하철에서는 과장 없이 90% 이상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각자의 사정은 있겠다마는, 대부분이 열심히 아래 위로 엄지손가락 운동중이다. 흡사 스마트폰 화면에서 던져주는 모이를 받아먹으려 기다리는 닭장의 닭들과 같다는 비판적 생각을 한 적이 많다.

많은 사람들은 요즘 점점 더 짧고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을 원한다. Shorts, TikTok, Reels 등등 바야흐로 숏폼의 전성시대. 한때 사용해본 유저의 입장에서, 이것들은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알아서 웃기고, 재밌고, 슬프고, 자극적인 것들을 알아서 내 눈 앞에 펼쳐놓는데 그 누가 마다하리. 다들 잘 알 것이기에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도 없겠다. 

나는 머신러닝 기반 추천시스템에 대한 개발 경험이 있고, 이러한 알고리즘에 기반한 숏폼 플랫폼은 개인의 취향을 최적화 시키거나 비즈니스적으로 활용하는 데에 가치가 분명히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한편으론, 이것이 까딱하면 소비자의 주의와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 악랄한 포맷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일상 속 아직도 아날로그적인 요소의 비중이 높은 독일에 있기 때문에 종종 디톡스를 할 수 있어 망정이지, 디지털 빠운스 대한민국에 있었다면 정말 정신병에 걸렸을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도파민은 중추신경계에 존재하는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다. 분비되면 신경과 감정조절에 영향을 미친다. 쾌락과 흥분을 느끼는 것이 그 결과다. 숏폼의 폐해는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자극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시 쾌락을 위해 더 짧은 텀으로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고 이에 중독된다. 결과적으로 끈기와 인내심, 집중력이 없어진다. 성인 ADHD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나는 중독성있는 단순한 행위로부터 얻어지는 도파민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 따라서 긴 호흡으로 진득하게 할 수 있는 단순하지 않은 무언가를 통해 쾌락추구성향을 경계하길 원하고, 그것은 글을 쓰는 행위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려서 나는 책을 끼고 글에 익숙한 아이는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주관(고집)이 뚜렷한 탓에 필이 확 꽂히는 것은 꽤 열심히 읽었지만, 대체로 글자 보다는 숫자를 좋아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사람이 주변에 몇 생겼지만, 나와는 다른 재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기에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한편, 시간이 더 흐르면서 나의 부족한 부분에 대한 어느정도 자기객관화가 되었던걸까. 그래서인지 매일같이 책을 끼고 살고, 자기만의 글을 쓰고, 읽는 즐거움을 설파하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존경과 동경과 함께 나도 한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혹자는 트렌드에 역행하는 행위를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하냐고 반문한다. 이에 답을 하자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비록 대단한 글들은 아니지만 도파민을 위해 아무 생각없이 엄지손가락 운동 하는 것 보다 생산적이고 가치있는 행위라고 느낀다. 긴 호흡으로 말이다. 물론 누구에게는 너무 아날로그적이고 고리타분한 일일 수 있겠지만.

가끔 씁쓸한 점은 나이들며 이렇게 새로운 트렌드에 뒤쳐지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마음이 안가는데. 숏폼에서 보통 내가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없을 뿐더러, 비즈니스를 한다거나 인플루언서가 되어 인기를 누리고 싶은 거창한 생각도 없다.

편안한 마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복잡한 머리속에서 튀어나오는 주제를 하나 꺼내어 첫 문장을 만들며, 알맞은 단어를 고르고, 마침표를 찍기까지의 행위.  그냥 이런 과정이 적어도 나를 위해서 즐겁고 행복하다.  그럼 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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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 Kwon Rhee

programmer + art enthusiast

Berlin,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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