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필요한 올빼미

빛이 필요한 올빼미

기억이 있을 무렵부터 나는 올빼미로 살아왔다. 

초딩때는 어둑한 책상 아래서 책을 읽거나 레고를 만들던 기억 (구석이나 협소한 공간을 유난히 좋아했다), 중학교때는 오밤중에 mp3에 음악넣다가 심취해서 밤샌 적이 셀 수 없이 많다. 고등학교때는 야자 끝나고 괜시리 한 두시간 동네를 걸으며 사색하다 집에 들어가곤 했고, 대학교때는 날밤새며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동고동락 한 추억이 많다.

공부를 해도 능률이 좋았고, 혼자 놀든 같이 놀든 즐거웠으며, 태생적으로 얼마 없는 메마른 감성에 조금이나마 촉촉히 젖어들곤 했다. 이렇듯 밤이라는 시간은 하루 중 어느때보다도 나에게 중요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Tempelhofer Feld
Tempelhofer Feld. 뛰거나 누워있기 아주 좋다.

반면 고민도 많았다. 해가 지고 밤의 특정 시간에 수면을 취하면 호르몬이 균형잡히고 뇌가 휴식하며 신체는 회복과 성장을 한다. 이것이 내가 배워온 과학적/의학적 상식이다. 하지만 이 상식에 반하는 삶을 살아왔던 때문일까, 어릴때 흔히 하는 부모의 키로 자식의 키를 예측하는 검사로부터 내가 185cm에 달하는 신장을 가질 것이라는 예상이 보기좋게 빗나간 이유는 단언컨대 나의 지독한 올빼미 습성 때문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겠다. 웃기지만 슬픈 사실이다. 

원시시대부터 각인된 인간의 본능을 내가 거스르는걸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원시인류는 빛이 있는 아침과 낮에 수렵과 채집을 하고, 밤이 되면 안전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내일을 준비했을 것이다. 원시에 살던 이태권이 만약 사색한답시고 고독을 즐기기 위해 밤중에 나다녔으면 목숨을 건 마지막 산책이었을 것이 자명하다. 또 그런 몇몇의 이태권들은 자연선택되어 슬프게도 후대에 유전자를 남기지 못했을 확률이 크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인가. 존재의 고민에 빠진다.

Tempelhofer Feld
Tempelhofer Feld. 뛰거나 누워있기 아주 좋다.

이런 자잘한 생각들을 뒤로한 채, 인간은 고로 아침과 낮에 햇빛을 봐야 한다는 것을 아프고 나서야 진실되게 느꼈다. 지난 여름동안 회복을 하며 최대한 의도적으로 햇빛을 많이 쬐려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신체와 멘탈 복구에 실질적으로 정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니 다시 어렵긴 했지만 말짱 도루묵까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빛을 쬐며 낮에 주된 활동을 하는 것이 나는 여전히 어렵다. 나에게 있어 아침형인간은 존경과 동경의 대상이다. 저 사람들은 나와 다르게 태어난걸까, 어떻게 아침에 저렇게 정신이 또렷할까, 밤시간이 주는 즐거운 고독을 알까 이런 생각들을 속으로 하곤 한다.

Tempelhofer Feld
귀여운 아가들의 거대한 놀이터 Tempelhofer Feld

현대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아침형인간 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라던가, “당신에게 맞는 생활 사이클을 찾아라”, “올빼미여도 괜찮아”라고 말한다. 한국의 서점가에서 이런 류의 책을 본 적이 있다. 

언뜻 보면 쉽다. 올빼미로 평생 살아도 왠지 문제가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진성 올빼미들의 문제는 수면시간의 부족도 있지만, 낮에 활동적으로 해를 쬐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적다는 것이다. 충분한 수면을 위한 생체주기을 찾으라는 것이 몇몇 책들의 요점이지 (일부의 책들은 이조차도 어설프다), 낮에 햇빛을 쬘 필요가 없다거나 혹은 반대로 꼭 해를 쬐야한다는 것에 초점에 맞추진 않는다. 

게다가 이런 책과 조언들이 옳다/그르다를 언급하길 꺼리는 현대사회 화법의 영향을 받은 느낌도 받았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 라던지 “~~ 해도 괜찮아” 식의 어설픈 위로의 타이틀이 달린 책들은 경계해야한다. 공감과 위로가 필요할만큼 살아가기 힘든 사회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겠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건강을 위해서라면 정확한 과학적 사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제목만 믿거나 내용에 호도되어 밤낮이 바뀌어 햇빛이라곤 언제 쬐었을지 모를 정도로 생활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고 착각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침형인간을 지향할 필요는 없다’ 내지 ‘낮과 밤이 바뀌어도 건강에 문제가 없다’를 주장하고 검증한 과학 논문이나 칼럼이 있다면 나에게 알려주길 바란다!

Tempelhofer Feld
해질녘 Tempelhofer Feld.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이 명제가 과학의 영역에서는 참일 수도 있고, 사회학적으로는 거짓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되고(or 닮고) 싶은 모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차피 변하지 않을 것을 상정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왠지 멋이 없다. 자기합리화를 한다며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better than nothing 아닌가. 때로는 한번 두 번 성공한 경험으로부터 나름의 만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얻는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몇 번 성공한걸로 아침형인간이 되었다고 내가 만약 스스로 으스대고 어설프게 떠벌리고 다닌다면 그 비웃음과 욕은 몸소 달게 받겠다. 다만 도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멋지다.

TU Sporthalle
TU Sporthalle. 좀 먼데 매주 간다.

아침형인간의 여부가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밤을 지새우는 것을 선호하는 성향으로부터 영영 헤어나오지 못할 사람이 나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침과 햇빛이 좋고 또 그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 햇볕을 쬐기 위해 노력하는 나의 모습은 멋지다.  

햇빛부족국가에서 요즘같이 해가 길어지고 여름이 온다는 것은 소중한 기회이자 엄청난 축복이다. 이 글을 보는 베를린 사람들 중, Tempelhofer Feld 에서 운동을 하거나 자리 깔고 앉아 광합성을 위해 낮 시간에 출몰한 나를 발견한다면, 친하고 안친하고 상관 없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기쁜 마음으로 제가 맥주를 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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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 Kwon Rhee

programmer + art enthusiast

Berlin,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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